지난주 넉 달 동안 다닌 연세대의 창의성 아카데미가 끝났다. 정갑영 연세대 총장의 마지막 수업이 기억에 남는다. 원래 제목은 연세대의 미래 비전. 그러나 강의는 넋두리로 흘러갔다. 정 총장은 미국 코넬대에서 경제학으로 학위를 받았다. 그런 그가 “총장이 되고 보니 도저히 경제학으로 풀 수 없는 세상이 널려 있더라”고 털어놓았다.
세브란스 병원을 새로 지을 때 이상한 점이 눈에 띄었다. 정 총장이 병원 측에 물었다.
정 총장=응급실 규모가 작아 보이네요?
병원 측=최소한의 법적 기준은 맞췄습니다. 응급실은 의료보험 수가가 낮아 클수록 손해가 납니다.
총장=중환자실도 작네요.
병원 측= 그곳도 마찬가지입니다. 큰 병원들의 응급실과 중환자실은 다 장마당처럼 복닥거립니다.
총장= 그런데 장례식장은 왜 이리 근사하게 만듭니까?
병원 측= 그건 의료보험이 적용되지 않아 장사가 됩니다.
총장=아니, 세브란스 병원은 사람 생명 살리자고 만들었잖아요? 목숨이 달린 응급실과 중환자실은 작고, 장례식장은 크고…. 병원이 마치 사람을 살리는 게 아니라 죽기를 바라는 것처럼 보이네요?
병원 측=가격통제를 하니 세상이 불합리하게 돼버렸습니다. 그나마 우리라서 손해를 봐도 어린이·재활병원을 계속하죠.
총장= 그럼 병원은 어디서 돈을 버나요?
병원 측=검사를 많이 해야죠. 영국 전체보다 서울에 있는 MRI 대수가 더 많습니다.
요즘 정 총장이 뿔난 이유는 또 하나 있다. 기숙사 때문이다. 연세대 신촌 캠퍼스는 기숙사가 태부족이다. 값비싼 서울 생활에 지친 학생들은 “기숙사를 지어달라”고 간청한다. 정 총장은 신발이 닳도록 돌아다닌 끝에 간신히 부영그룹에서 415명이 묵는 100억원짜리 기숙사를 기증받았다. 문제는 부지였다. 신촌 캠퍼스에 기숙사가 들어설 공간은 북문 쪽 언덕밖에 남아있지 않다.
원래 이곳은 황량한 야산이었다. 연세대는 20여 년 전 북문 언덕의 무성한 잡초를 뽑고 나무를 심었다. 나무는 무럭무럭 자라 숲이 됐다. 그래서 탈이 났다. 연세대가 이곳에 기숙사를 지으려 하자, 서울시와 구청 측이 “입목도(立木度)가 좋아 형질변경이 어렵다”며 난색을 지었다. 좋은 의도로 북문 언덕을 가꾼 게 제 무덤을 판 꼴이 됐다.
정 총장은 연세대 출신의 건설회사 CEO들에게 지혜를 구했다. 다음은 그들이 몰래 전수한 비법이다. “장마나 폭설 때 산사태를 예방하기 위해 합법적으로 15%의 나무를 베어 낼 수 있다. 넉넉잡고 10년만 계속하면 아무리 좋은 녹지도 형질변경이 가능하다.” 정 총장은 혀를 찼다. “비뚤어진 법에 맞추기 위해, 정의를 가르치는 대학이 편법에 기대야 할 판이다.” 다행히 서울시는 1년간의 씨름 끝에 연세대의 소원을 들어주기로 방향을 잡은 모양이다. 정 총장은 “대학이 아니라면 불가능했을지 모른다”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정 총장이 쓴 책 가운데 『제3의 자본』이 있다. 현대 사회에는 인적 자본(노동력)과 물적 자본(생산설비)뿐만 아니라 법·제도·규범과 같은 사회적 자본이 중요하다는 내용이다. 이에 앞서 프랜시스 후쿠야마와 로버트 푸트남도 “사회적 자본이 축적된 나라일수록 효율성이 높고, 더 높은 경제 성장을 성취했다”는 사실을 입증한 바 있다. 박근혜 대통령도 “우리가 넘어야 할 마지막 관문은 사회적 자본을 쌓는 것”이라 말했다.
하지만 우리의 사회적 자본은 얼마나 튼실할까? 한국개발연구원(KDI)은 우리의 사회적 자본을 설문조사한 일이 있다. 만점을 10점, 불신을 0점으로 할 때 국회(2.95)-정당(3.31)-정부(3.35)-법원(4.29)-경찰(4.49) 순으로 신뢰도가 낮았다. 재미있는 사실은 생전 처음 본 낯선 사람에 대한 신뢰도가 4.0이란 점이다. 처음 만난 사람보다 국회와 정부를 더 믿지 못하니, 그들이 만드는 법·제도 또한 신뢰를 받지 못하는 건 당연하다.
우리 의료보험은 세계에서 손꼽힌다. 누구나 쉽게 응급실과 중환자실에 갈 수 있도록 낮게 의료수가를 책정했다. 뜻이야 좋았다. 하지만 병원은 환자를 살리기보다 죽기를 바라는 기형적인 구도로 가고 있다. 의료 수가를 현실화해야 할 듯싶다. 기숙사를 짓기 위해 야금야금 나무를 베어 내는 것도 말이 안 되는 이야기다. 제3의 자본이 빈약한 사회에는 음모론과 불신이 자라난다. 자칫 이 글도 연세대 입장만 두둔하는 것처럼 비칠까 겁난다. 참고로, 필자는 연세대를 나오지 않았다.
이철호 논설위원